영웅은 미지를 사랑한다. 자신에게 미지를 남기는 이들을 사랑한다. 영웅의 세계는 거대하고 다정한 애정 속에 자리 잡은 채 흘러갔다. 그렇기에 그녀는 영웅이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주 작은 선의와 사랑이 이미 세계를 스쳤으니, 자신 손길이 닿지 못한 곳으로 떠나리라. 다만 그녀는 그것이 아쉽지 않았다. 이 세계는 종언에서 구원받았고, 아름다운 하늘을 선물 받았다. 저 애정과 선함을 우리가 독점할 수 없단 사실을 진작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녀는 영웅을 배웅하는 길에도 울지 않았다. 눈물을 머금고 아쉬운 작별을 남긴 이들 사이에서 한껏 웃어 보이려 했다. 내 웃음은 당신을 위한 작별 선물이자 나의 존경의 표시입니다. 입술 위를 떠도는 낱말의 나열을 애써 갈무리한다. 영웅의 미련을 무기 삼아 그를 매어둘 수는 없었다. 그와 우리 모두 한 거대한 운명 속에 있음을, 그녀는 안다. 눈 아프게 내리쬐는 빛을 거두어가던 영웅, 죽음에 눈물짓고, 또 사랑하는 이들을 품 안에 안고 웃는 선한 사람. 영웅이란 거대한 이름 속에 숨 쉬던 평범한 이.
시간은 흐른다. 그녀는 그가 떠난 지 꼬박 일주일째 그가 머물던 방을 정리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거대한 운명이 태동하는 지금, 그의 빈자리가 유난히 낯설다. 우리가 나아가는 모습을 더 지켜보고 싶지는 않았나요? 목 끝까지 차오르던 말은 그녀의 미련이다. 동료들과 귀환하기 위해 다른 고난을 거쳤던 영웅을 생각하면,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일로 마음 쓰는지 안다. 하여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웃으며 그를 보내주고, 그의 짐을 정리하고, 수정공의 빈자리를 채우는 이들과 세상을 살아간다. 달라진 건 그리 없다. 그의 존재만이 그녀 세상에서 사라진 채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 안에 남은 아쉬움을 맞이한다. 이 변화를 그와 함께했다면. 아쉬움이 그녀 안에서 천천히 맴돈다. 어떤 단어도 이 감정을 명료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천천히 내쉰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던 영웅에게 배운 습관이었다.
“이슈타르 씨?”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생각에 빠져 있었나요?”
“그럴 수 있죠. 한참 바쁠 시기고, 그분의 일을 정리하는 데만 해도 며칠을 꼬박 보냈잖아요.”
“일이 힘들단 이야기가 아니라…….”
알고 있어요. 그리 덧붙인 크리스타리움의 주민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둠의 전사가 이곳에 머무르던 시절보다 조금 더 마르고,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진 이슈타르를 걱정하는 게 눈에 빤했다. 그녀 역시 그를 알기에 더 씩씩한 미소를 덧그린다. 그가 남긴 흔적은 무척이나 강렬하고 선명하여 눈을 뗄 수 없게 하지만, 그녀는 슬픔과 그리움에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되레 그가 새긴 흔적의 강렬함을 곱씹으며 변한 자신을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이슈타르는 손끝에 닿던 따뜻한 영웅의 체온을 떠올린다. 강한 이들은 그 피마저 차게 식은 줄 알았는데, 그 온도는 감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생명이 타오르는 온도란 이리 강렬한 것일까. 이슈타르는 눈앞에 도달한 진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나 도저히 이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저 혼이 모두 타버리면 그의 존재는 다시 이 땅을 디딜 수 없으리다. 이슈타르는 버려진 삶의 비참함을 안다. 수십 번의 밤마다 밀려오는 자괴감을 안다. 그렇기에 영웅이 이리 허무히 져버리는 걸 바라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는 이슈타르가 영웅의 곁을 지키는 계기가 된다. 도움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던 어리숙한 사람이 영웅이란 이름을 달게 될 때까지의 여정을 상상치 못했기에….
그녀 다짐이 우습게도 영웅은 이곳으로 돌아왔다. 조금의 상처를 매단 채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향으로 돌아간 수정공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가 얼마나 세상을 벅차게 살아가는지, 가슴 속 깊이 그리워한 이들을 만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듣는 주민들은 어느새 눈가에 물방울을 맺은 채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모든 이야기를 건네준 그는 이슈타르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좀 멋쩍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영웅은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 내 비서 해줄 수 있어?’ 그 한마디가 그녀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선명한 호흡처럼 들려왔는지 그는 짐작지 못할 것이다. 이슈타르의 눈동자가 이채를 감고,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조차 눈치채지 못했으니. 영웅은 제가 한 여행을 읊어주었다. 이곳 세계를 구한 뒤에도 영웅의 발자취는 멈추는 법이 없다. 원초세계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와중 이곳에 들러도 좋았던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를 감추지 못하는 그녀에게 메테오는 옅은 웃음을 덧그렸다.
“이곳에 오면 내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이야. 이 땅에 내린 슬픔을 모두 내가 거두어 갈 수는 없었지만, 삶의 기쁨과 내일의 희망을 안겨줄 수 있던 걸 영광으로 생각해. 그리 생각지 않아도, 누군가는 나의 궤적을 비극으로 기억할지라도. 감히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더라도.”
영웅의 말에 이슈타르는 어떤 생각을 하였던가. 모르는 새 영웅이 변한 건 아니었다.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리 없다. 그녀는 비로소 영웅의 부드러운 살갗을 보았다. 선한 사람이기에 남을 수밖에 없던 흉터의 색과 모양을 기억한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영웅을 자신의 품 안 깊이 끌어안았다. 품에 가둘 수 없이 삐져나온 모양새임에도 영웅은 그녀의 온기에 눈을 감고 깊게 호흡했다. 그래. 영웅도 인간이다. 갈 곳 잃은 감정들을 갈무리하고, 엉망이 된 속내를 다듬지 못하면 무너지게 되어있다. 그녀는 품에 안긴 메테오의 호흡이 참으로 거칠었더라고 회고한다. 나의 호흡을 나누어줄 수 있었다면, 단지 품 안에 파고드는 거대한 어둠을 이슈타르는 꼭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의 아쉬움이었는지 영웅의 바람이었는지… 서로 알 수 없었다. 누구도 이 순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영웅은 여행했다. 별의 운명을 점치고, 자신의 짧은 호흡까지 바쳐가며 여행했다. 이 발자취 끝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도, 후회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웅은 그 거대한 우주 속에서 그리 생각했다. 아. 그녀를 만나고 올 것을. 감히 이 부족한 사랑을 고백하고, 그녀 웃음을 지켜볼 것을. 영웅은 어느새 자신 안에 자라나 자신보다 거대해진 애정을 바라보았다.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 고향이 자신 손끝에 걸려있지 않은가. 네가 사랑하는 세계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세계를 지키는 방법이란.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영웅은 처음으로 무엇도 질문하지 않았다. 아마 돌아오지 못하리다. 돌아오더라도 그녀 곁에는 갈 수 없으리다. 그렇기에 영웅은 욕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눈동자를 맞춰오는 그녀를 피해 달아나고, 1세계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그리움이 묻어 나올 때면 메테오는 죽음을 생각했다. 내 감히 너의 시간을 앗아가려 하거든, 나의 신께서 나를 벌하리다. 메테오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를 아는 모든 이가 말하건대 긴장으로 제정신이 아니라 말하겠다.